<이주민과 함께X아름다운재단 이주민영유아 지원사례> 베트남 엄마의 텅 빈 주머니와 꽉 찬 사랑, 그 안에서 자라는 아이

지원사업

세상은 1.34kg이라는 숫자가 너무 작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그 무게에 자신의 온 삶을 걸고 버텨냈습니다.

아기의 위태로운 첫 호흡과 이어지는 병원 생활
2024년 9월 4일, 세상의 빛을 본 누엔****의 첫 호흡은 위태로웠다. 예정일보다 훨씬 이른 34주 만에 태어난 아기의 몸무게는 고작 1.34kg. 호흡이 비정상인 데다 신생아 패혈증과 상세불명의 혈소판감소증 그리고 온몸에 퍼진 청색증에 열까지 끓었다. 탄생을 축복받아야 할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의 인큐베이터 안에서 아기는 우유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결국, 장 수술과 급성장염이라는 합병증까지 겹쳐서 세 곳의 병원을 숨 가쁘게 옮겨 다녀야 했다. 건강보험이 없는 미등록인 아기에게 청구된 총진료비는 무려 1억 1,200만 원. 그것은 평범한 노동자인 엄마가 일생을 벌어도 모으기 힘든 거대한 성벽 같았다.

엄마 – 처음에 창원 소재 대학병원에 한 달 정도 입원했는데, 장에 문제가 있다며 수술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아이가 너무 작은 데다가, 수술비용까지 생각하면 정말 눈앞이 캄캄했어요. 그 후 급성장염으로 양산 소재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는데, 당시 저는 한국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의사 선생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합병증이 발생했다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다시 부산 소재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지요. 보험이 없으니 병원비가 1억 원이 넘게 나왔는데, 정말 절망적이었어요. 다행히 여러 기관의 도움으로 7천만 원을 지원받았고, 300만 원의 진료비 지원사업 덕분에 고비를 넘길 수 있었어요.

엄마는 아이가 아픈 것이 임신 중에 제대로 먹지 못한 본인 탓인 것만 같아 괴로울 때도 있다. 조금이라도 돈을 더 모아야 했기 때문에 만삭 때까지 자동차 공장에서 100시간 넘게 초과근무를 하며 버텼던 시간이, 오히려 아이에게 독이 된 것은 아닐까 자책감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15개월이 된 누엔****는 건강을 회복해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여전히 장 흡수력이 약해 또래보다 작지만, 엄마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감사한 기적이다.

엄마 – 의사 선생님이 아이가 작으니까 유전자 검사도 해보자고 했는데, 이미 병원비로 수천만 원을 쓴 뒤라 더는 돈이 없어서 못 한다고 했어요. 그땐 정말 속상했어요. 그래도 이제는 병원에서 ‘괜찮으니 안 와도 된다’라는 말을 들었어요. 아이가 순해서 잠을 못 자도, 여전히 건강을 조심해야 하지만 저는 힘들지 않아요. 그저 집에서 함께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엇갈린 엄마 아빠의 인연과 홀로 선 엄마
엄마는 베트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012년 결혼비자로 입국해 11년째 한국에 살고 있지만, 2016년 남편과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별거를 시작하면서 엄마의 법적 보호망은 사라졌다. 미등록 신분이 된 엄마는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좋은 인연을 만나 계속 살고 싶었다. 그러다 베트남 국적의 아빠를 만났고 단란한 가정을 꿈꿨지만, 아빠는 임신 사실조차 모른 채 베트남으로 잠적해버렸다. 연락이 끊긴 아빠를 원망할 시간조차 엄마에게는 없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심장병 치료비까지 송금해야 했기 때문이다. 창원 공장에서 한 달에 330만 원을 벌어서 고향에 보내고 출산을 위해 차곡차곡 모았지만, 아이가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직장을 잃었고, 모아둔 퇴직금 600만 원과 저축해온 2,800만 원은 고스란히 병원비로 들어갔다.

엄마 – 아직 창원의 병원에는 1,178만 원 미수금이 남아서 매달 20만 원씩 갚아나가고 있어요. 어차피 중환자실에는 보호자가 같이 있을 수 없으니 병원비를 벌기 위해 농촌에서 일용직 일을 하고, 일없는 날에 아이를 보러 병원에 왔어요. 지금은 동네에 있는 병원 식당에서 하루 4시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100만 원 남짓 받는데, 어린이집 보육료 50만 원과 미수금을 내고 나면 생활비가 없어요. 아끼고 아끼면서 견디고 있어요. 이제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5시에 와요. 그래서 오후 5시까지 일할 수 있는 다른 곳을 알아보고 있어요.

엄마와 누엔****는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5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단둘이 산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베트남 언니가 유일한 통역 도우미일 뿐, 경제적으로 기댈 곳은 전혀 없다. 급한 마음에 주위 사람에게 빌린 130만 원 빚이 있지만, 수도와 전기가 끊길까 봐 공과금부터 내다보니 아직도 갚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누엔****가 배 안에 있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다시 일어나 열심히 일해서 하나씩 갚아나갈 생각이다.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보며 엄마는 신발끈을 동여맨다.

따듯한 지원이 이방인에서 이웃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엄마를 일으켜 세운 것은 주변의 따듯한 손길들이었다. 민간재단인 <위프렌즈>와 <세이브더칠드런>, <이주민과함께> 같은 기관들이 나선 덕분에 1억 원이 넘는 병원비를 100% 수가 전환하여 5천9백만 원으로 낮출 수 있었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아이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카톨릭신문사에서도 모금 활동을 벌여 기부금 3,950만 원을 모았는데, 덕택에 진료를 받고 남은 기부금으로 보육료도 내고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병원에서도 퇴원할 때 후원금을 주었고, 아기 옷과 분유 후원도 이어졌다.
<이주민과함께>에서는 지원한 긴급 생계비 50만 원을 받아든 엄마는 누엔****의 다음 달 보육료를 해결할 수 있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늘 아이를 먼저 챙기는 엄마다.

엄마 –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늘 두려움이 있었는데, 이렇게 많은 곳에서 도움 주시는 것을 겪고 나니 이제는 제 생각도 좀 달라졌어요. 무척 감사하고 사회에 나갈 힘을 얻어요. 한 번씩은 제가 부모 역할을 잘 못 해서 아이가 뒤처지거나 힘들어질까 봐 걱정도 되지만요. 이제 병원 치료도 끝났고, 혹시나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도록 절에서 운영하는 의료공제 같은 것도 가입했어요.

엄마는 한국이 더 이상 차가운 이방인의 땅이 아님을 느낀다. 비록 아이의 성장을 위해 베트남어로 육아 정보를 검색하고 번역기를 돌려가며 공부해야 하는 고단한 일상이지만, 엄마는 이제 아이와 함께 미래를 꿈꾸며 한발씩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당장은 베트남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지만, 아이가 건강하게 더 자라면 부모님이 계신 본국으로 돌아갈 결심도 하고 있다. 그전까지는 이 땅에서 아이의 건강을 지키며 잘 키우는 것이 엄마의 유일하고도 간절한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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